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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학술논문지원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예술> (서현석)

2015.06.18

작성자 | 관리자

첨부파일 |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예술

서현석 

 

 

논문개요

 

 

오늘날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과감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해설, 관찰, 참여, 성찰과는 구분이 되는 보다 능동적인 사실의 창발적 구성이 그것이다. 이렇나 시도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윤리, 진실, 사실 등 다큐멘터리에서 역사적으로 핵심이 되어왔던 주요 개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구성되는가에 대한 진지하고도 창의적인 문제의식이다.  '수행적'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다큐멘터리의 담론 내에서 이루어졌던 논제들로 부터 벗어나 다큐멘터리의 기원부터 중요한 상호작용의 장으로 작용해왔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최근 흐름을 포용하는 다원적인 관점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주시할 수 있는 바는, 오늘날 다각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은 평면적인 사실을 넘어서는 입체적이고 유기적이며 가변적인 사회적 문맥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제어: 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수행성

 

목차

1. 서론
2. 역사적 고찰: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근원적 동질성
3. 사실에 대한 창의적 성찰, : 수행적 다큐멘터리
4. '미학'에서 실천으로
5. 가변적 사실에 대한 가변적 결론


 

1. 서론
   '다큐멘터리'라는 영역은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유기적인 것이지만, 시대와 관점을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에 가까운 정체성이 있다면 '사실'과의 결연일 것이다.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수행하는 수사의 기반이자, 윤리의 근원이다.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는 영상 매체가 연루되는 다른 형태의 창작 행위로부터 명확하게 구분된다. 사실에 대한 지시(index)적인 기능에 기반을 두는 사진적, 영화적 이미지의 기호적 특성은 하나의 묵직한 사명감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주체에 주어졌다. 그 무게로 인해 다큐멘터리는 '허구'라는 작위성의 영역과 결별할 뿐 아니라, 허구가 동반하는 담론의 방식과 소통의 장으로부터 멀어졌다. 빌 니콜스(Bill Nichols)가 지적했듯, 다큐멘터리는 예술이나 오락 보다는 "근엄성의 담론(discours of sobriety)",  즉 "과학, 경제, 정치, 외교, 교육, 종교, 복지"​ 1)  등에 근접하여 "도구적 권력"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체계로 발전해 온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를 성립시키는 기능적 요소들과 연관되면서 생기는 "근엄한 태도(air of sobriety)"야말로 다큐멘터리를 규정하는 기반이자 그것의 지향점이 되어왔다.
    때문에 다큐멘터리는 그것의 당위성에 대한 척도로서 항상 윤리적 관점을 동반하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속성은 다른 형태의 영상, 이를테면 극영화나 실험영화, 애니메이션, 비디오아트 등과 좀처럼 공유되지 않는 특수한 것이다. 영화 이미지의 지시적 기능을 기반으로 발달한 극영화만 하더라도, 사실을 처리하는 방식은 언제나 창작 주체의 창의적 표현력 혹은 '스타일(style)'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반면 다큐멘터리의 '스타일'은 그것이 지시하는 세계의 현상들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목적에 의해 가려졌다. 니콜스가 지적하듯, 극영화의 리얼리즘이 언제나 '미학'의 문제였다면 ,다큐멘터리는 '윤리학'에 귀속된다.2)  미적 체험보다는 지식의 추구가, 정서보다는 이성과 논리가, 그리고 동화와 몰입보다는 냉철한 거리감이 다큐멘터리를 지탱하는 결정적 기반으로 존립해 온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영역과 다큐멘터리의 영역은 서로 공유되지 않는 지각과 소통에 관한 문제의식의 차이에 의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학'은 오랫동안 다큐멘터리에서 유지되어 온 금기이자 타자성이며, 이러한 금기는 '윤리'라고 하는 오랜 초자아적 권위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적 차이는 최근 들어 여러 방식으로 극복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사실에 대한 고정된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기록과 소통 방식에 대한 과감한 형식적 실험을 함에 있어서 현대예술은 요긴한 전형이 되고 있으며 , 예술 작가들이 갤러리의 공간적,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현실에 다가가려는 의도 속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오랫동안 수호해 온 지식애호증(epistephilia)적 동기가 작동하기도 한다. 영화제와 비엔날레를 오가며 작품을 선보이거나 심지어는 공연페스티벌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는 작가들의 사례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제 영화관과 예술관의 간극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전시 공간이 영화의 계약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영화의 관람객이 스크린을 통해 예술작가를 접하기도 한다. 빌 비올라(Bill Viola), 아이작 줄리앙(Isaac Julien),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필리페 파레노(Phillippe Parreno), 피에르 위게(Pierre Huyghe), 아피찻퐁 위라세타클(Apichatpong Weerasethakul), 양후동(Yang Fu Dong) 등과 같은 작가들은 기존의 매체간의, 도구간의, 담론간의 경계들을 오가며, 이러한 역동적인 태도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횡단한다. 위에 호명한 해외의 작가들의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다양한 문맥을 통해 여러 차례 국내에서도 소개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이러한 성향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나타나고 있다. 유지숙, 김종국, 임민욱, 함경아, 조윤경 등의 다큐멘터리적 성향을 띈 영상 작품들이 예술, 영화, 연극 등의 기존의 장을 오가며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나 변화의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로 인해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확장해야 하는 필요성, 그리고 예술이 추구하는 새로운 지향점에 대한 사고의 필요성이 새롭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원화되고 다각화된 문화적 환경에서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규정하고 그 기능을 지지했던 담론의 체계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기존의 시각예술이나 공연에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개입됨으로 인하여 표현과 소통의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되는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역동성에 관한 탐구이다.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생명력이 시사하는 역사적, 사회적, '미학적' 의미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며, 이러한 성찰을 위해 새롭게 고려해야만 하는 담론적 요소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과정이다.
  다큐멘터리와 현대 예술이 접목하는 형태는 오늘날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중에서 본 연구가 주목하고자 하는 성향은 작품이 폐쇄된 미학적 독립성에 안주하지 않고 텍스트의 형식적 경계를 넘어 사회 현실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예술의 전략을 수영한느 다큐멘터리 작품에서나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공연이나 시각예술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를 분석적으로 다루기 위해 '수행성performnativity' 이라는 개념을 활용 할 것이다.

 

 

1)Bill Nicols, Representing realit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1.p.3.

2)같은 책,p.166.

 

 

2. 역사적 고찰 :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근원적 동질성
  다큐멘터리의 기원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목적성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해 본다면,두 영역간의 밀접한 관계는 쉽게 드러난다. 영화의 역사에서 두 개념이 생명력을 얻게 된 시기만 하더라도 모두 1920년대 중반으로, 이러한 공통적 시대적 배경에는 당시에 소통되던 영화 매체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들어 있을뿐 아니라, 두 영역은 심지어 발생적 동질성을 갖기도 한다.
  1926년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에 의해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언급될 무렵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대안적 접근이 시도되던 때였다. 할리우드에 우후죽순 생겨난 스튜디오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산업화된 영화의 미학적인 경직성에 대한 반향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안적 태도의 다양성은 폭넓게 나타났다. 영화적 이미지의 지시(index)적 기능을 배제한 추상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다다(Dada)나 초현실주의의 역동성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다양한 시도들이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만 레이(Man Ray), 루이 브뉘엘(Luis Bunuel), 살바도르 달리(Salvador)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 다양한 시도들에 나타나는 태도와 형식은 각자 달랐지만,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한 가지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었다면, 영화의 미학이 지나치게 문학과 연극에 의존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 의식이었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라프가 발명된 지 30여년이 지난 시점에 영화는 이야기의 전달을 위한 목적에 치중하고 있었고, 시네마토그라프가 처음으로 소개될 때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지각적 경이감은 망각된 상태였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영화 매체의 잊힌 광학적, 기술적 신비를 복원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정지된 그림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작위적으로 움직임을 만든다는 영화 장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새삼 다시 창의적 발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시도를 이룬 작가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극영화의 문제는 환영적(illusionist) 기반이었다. 즉,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이 작위적으로 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대한 지시적인 기능의 강력한 자력으로 인해 허구성을 망각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기존 영화의 경직성에 대한 반향이 1920년대에 여러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그중에서 영화 매체와 사실과의 인연을 오히려 부각시킴으로서 오랜 타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일련의 시도들에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어슨이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 <모아나>(1926)라는 영화를 평하는 기사 3)에서 "다큐멘터리적"이라고 일컬은 배경에는 역시 플래허티의 과감하고도 선구적인 시도에 대한 경탄이 있었던 것이다. "여행록(travellog)"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단어를 차용하면서 그리어슨이 동조한 플래허티의 태도는 스튜디오에 귀속되지 않고 세상을 이동하며 자연과 인간의 존재론적인 역동성을 '몸소'수행한 것에 있다. <북극의 나눅>부터 인간이 거친 자연속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 플래허티는 단지 영화의 내용만으로 이 주제의식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어려운 환경속에서 영화 제작을 감행함으로써 내용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을 체현한 것이다. 플래허티는 다큐멘터리를 개척한 선구적인 인물로 오늘날 평가되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다큐멘터리'라는 개념과 그것에 부여되는 여러 기능적 요소들을 좇아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익숙한) 실제 상황과 실제 인물들과 교류하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었고, 이는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리어슨이 다큐멘터리가 변혁적인 가능성을 갖는다고 기대한 것은 관습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대문이다. 그는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지 7여년 만에 발표한 "다큐멘터리의 일차적 원칙들(Frist Principles of Documentary)" 4) 이라는 기념비적인 글에서 영화의 진부함으로부터 벗어나야하는 필요성과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위적인 배경에서 연출된 이야기를 촬영"하는 "스튜디오 영화"는 영화가 가진 원형적인 능력을 망각하며, 그에게 있어서 영화만의 특별한 능력이란 "자유롭게 이동하며 삶을 관찰하고 선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영화가 다시 새로운 활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스튜디오와 그것이 의존하는 기계적인 과정으로부터 걸어 나가 거친 삶의 현장 속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얻어낼 때 화면은 "특별한 가치"를 품게 된다. 실제 인물과 실제 환경이랴말로 스튜디오 영화가 얻지 못하는 영화 특유의 예술적 재료들인 것이다. 그리어슨이 플래허티를 예찬한 이유는 바로 할리우드의 관습적인 진부함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변혁적 가능성은 바로 기존 영화의 경직된 평면성에 대한 반향에 있었다. 이 지점이 바로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가 1920년대에 공유했던 철학이자 '실천'이다. 다큐멘터리가 초기에 지향한 바와 마찬가지로 , 결국 아방가르드의 기원적 기능 역시 정치적인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본래 '척후병'을 뜻하는 군사 용어를 예술에 처음으로 적용한 올린데 로드리게스(Olinde Rodrigues)는 1825년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생산자(L'artiste, le servant et l'industriel)"라는 글을 통해 예술이야말로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이루기 위한 가낭 즉각적이고 빠른 "대중의 아방가르드"라 표현했던 것이다. 그 후 19세기에 걸쳐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급진적인 정치적 목적과 연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오늘날 일련의 다큐멘터리작품과 예술이나 공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은 두 영역이 공유했던 근원적 기반, 미학을 벗어나는 정치성을 지향하는 철학의 실천을 복원하는 것이다.

 

 

3)John Grierson, "Flraherty's Poetic Moana", The Documentary Tradition, Lewis Jacobs(Ed,). New York and London: W.W.Norton&Company, 1971, pp.25-26.
4)John Grierson, "First Principles of Documentary", The European Cinema Readerm Catherine Fowler(Ed,). London and New York:Routledge, 2002, pp.39-44. 

 

 

3. 사실에 대한 창의적 성찰: 수행적 다큐멘터리
   체코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공적인 담론이 절정에 달하던 2003년, 프라하 영화학교의 재학생이던 비트 클루삭(Vit Klusack)과 필립 레문다(Filip Remunda)는 '체코 드림'이라는 초대형 매장을 설립한다. 개점을  준비하며 스스로 매니저를 자처, 기업의 깔끔한 이미지를 홍보한다. "저명한" 광고회사에 위탁하여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자체적으로 유통할 상품의 포장이 디자인되고, 회사의 로고가 부착되며, 그 세련됨은 광고사진과 영상에 의해 배가된다. 프라하 거리의 벽과 지하철, 버스, 전광판 등에 대대적으로 부착된 포스터는 역설적인 광고문구로 시민들의 시선을 끈다. "오지 마세요, 사지 마세요(Don't come. Don't spend)"라는 호소다.
   개점에 앞선 준비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다. 하지만 여타의 마케팅 전략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매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체코 드림'은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 실체가 없는 허상인 것이다. 두 감독은 유럽 연합을 가입할 때 주어질 것이라는 여러 혜택들을 선전하는 정부의 원색적인 캠페인, 그리고 시장경제의 도입 이후 급격하게 팽배한 물질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을 기획한 것이다.
   이 해프닝의 가상적 기반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된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개점일에 파격적인 저가 구매를 '꿈'구며 ("오지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름처럼 모여든 3000여명의 실질적 소비자들의 좌초된 무거운 발걸음에 얹힌다. 개장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매장진입구에 어렵게 도착한 군중은 멀리 지평선상에 보이는 ;꿈;의 장소를 바라보며 일제히 허허벌판을 바쁜 걸음으로 가로지른다. 그들의 빠른 발걸음은 체코가 이제 소비사회가 되었을뿐 아니라,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었음을 우스꽝스럽고도 아프게 드러낸다. 게 중에는 나이 들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꽤 보인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 가까워지는 '꿈'의 장소는, 건축적인 구조조차 없는 텅 빈 허수아비 간판임이 드러난다. 그들이 '꿈'꾸던 저가의 상품들로 가득한 수려한 진열대는 물론 이거니와 아예 건물조차 없다. 대강 세워진 거대한 평면의 구조물의 이면에서 소비자들이 만나는 것은 허상을 지탱하는 허접한 나무 지지대와 무성한 잡초뿐이다.
   헛걸음을 한 사람들의 충격은 '가상'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극심한 실망과 좌절과 분노로 바뀐다. 분노의 이유는 다양하다. 사소한 유아적 장난에 속아 넘어갔다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저가의 상품을 아쉬워하는 충실한 소비자도 보인다. 가증스런 거짓말을 사회와 역사의 문맥에서 파악, 그 동안의 정부의 거짓말도 지겨울 판인데 아직도 이런 일이 있을수 있냐며 격노하는 사람도 있다. 설사 "이런 허상이 바로 오늘날 체코가 꾸는 허망한 꿈"임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노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기획자의 숨은 취지를 이해는 하더라도 용서는 할 수 없다는 식이다.
   분노를 드러내는 군중 앞에서 두 젊은 감독들은 자신들의 창의성을 옹호한다. (대기업 본사의 로비에서 불편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도 순진, 단순한 논거로 후퇴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뻔뻔한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두 젊은이는 시민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자 도리어 화를 내는 기색이다. 이들의 진지함을 가까스로 인정해주며 세대 간의 차이를 절감하는 노년의 시민도 슬쩍 보인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체코 드림(Cesky Sen)>(2004)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사실적' 내용이다. 5)  이 극장 배급용 장편은 두 감독이 발칙한 상상을 실행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기록하여 보여준다. 감독들이 가짜 매장 건조물이 세워질 공터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장면부터, 그들이 대형 매장의 매니저다운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휴고 보스'의 의상협찬을 받아) 변신하는 모습, 가짜 홍보전략을 기획하고 가짜 로고, 가짜 상품, 가짜 광고, 가짜 포스터를 제작, 유통하는 과정, 그리고 가까 개장 당일 사람들의 '진짜' 당혹이 격발하기까지, 여기에 덧붙여 신문과 방송을 통해 벌어지는 토론까지 포함, <체코 드림>은 이벤트의 긴 여정과 후담을 '기록'하여 보여준다.
   해설자의 설명도 없이 이루어진 작품의 구성을 니콜스의 양식(mode)의 범주에 대입한다면,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개입 없이 보여주는 관찰적 양식(observational mode)과 인터뷰 등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이루는 참여적 양식(participatory mode)의 특징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작품의 구성 요소에 대한 분석적 관점으로 범주화할 만한 것이 아니다. 표면적인 양식적 특징을 통해 재현되는 사실 자체가 감독들의 의도에 의해 작위적으로 촉발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거의 모든 장면에서 드러나는 수사적 성향은 수행적 양식(performative mode)에 가깝다.
   니콜스에 따르면, 수행적 양식의 중요한 특징 중에는 지식의 성립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성찰적 태도가 포함된다 "깨닫는다거나 이해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황적인 정보 외에도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6)  수행적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가 전통적으로 취해왔던 지식 추구 방식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의문시한다. 객관적이라 여겼던 진실의 영역, 그리고 이를 성립시켰던 사유의 방식이 절대적인 것인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그 기반에서 작동한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논증적 절차에 문제의식 없이 의존하기 이전에, 지식의 성립을 위해 작용할 수 있는 다른 요소와 방식들이 있을 수 있는지, 있다면 무엇이 될 수있는지, 개방적인 태도로 탐구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오히려 중요시되는 것은 지식을 수집하는 과정에 연루될 수 있는 사적인 정서와 관심사이다. 의미란 관습적인 사유 방식에 따라 규정되는 정해지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명백히 주관적이며 정서를 동반하는 것"이다. 7)  지식의 성립이란 그만큼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과 가치관이나 믿음 등은 수행적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개입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발현하는 과정은 따라서 창의적일 수 밖에 없으며, 표현의 방식은 다양하게 열린다. 그만큼 수행적 다큐멘터리는 아방가르드의 영역에 근접한다. 결국 수행적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이란 "증거들의 종합체"에 머물지 않는 촉발적인(evocative)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8)
   니콜스의 이러한 설명은 다큐멘터리의 범주가 그만큼 다양화되고 있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양식'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유형들을 설명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니콜스는 수행적 양식을 포함하지도, 거론하지도 않았다. 해설적 양식, 관찰적 양식, 상호작용적 양식, 성찰적 양식의 네가지 양식을 제시한 1991년의 저서 [Representing Reality]로부터 2001년에 출간한 [Introduction to Documentary]에서 크게 달라진것은 시적 양식과 수행적 양식의 추가이다. 기존 이론의 보완을 위해 추가된 두 양식의 공통적 요소라면, 사적인 체험과 감정이다. 이로써 니콜스는 주관점 관점이 그만큼 다큐멘터리에서도 중시될 수 있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중요한 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니콜스가 수행적 양식을 제안한 이후에 만들어진 <체코 드림>과 같은 작품은 니콜스가 설명하는 수행적 양식의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작품의 발상과 추진은 한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에 근원을 두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층위에서의 관심과 욕구를 추진력으로 이루어지며, 단순히 사회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과 지식을 채집하고 기록하는 대신 창의적인 발상을 '수행'한다. 분노한 군중들의 틈 속에서 "이 젊은이들은(감독들)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한 시민의 발언은 다큐멘터리에서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발상의 전환에도 해당 될 수 있는 말이다. 수행적 다큐멘터리의 '수행자'는그가 다루는 문제가 공통체 전체의 것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방식과 관점을 통해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콜스의 '수행적'이라는 수식어는 분명 <체코 드림>을 통해 볼 수 있는 최근 다큐멘터리의 역동적인 변화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표현력'은 수행적 양식의 일반적인 속성에 대한 니콜스의 설명을 초과하는 보다 구체적인 특수성을 지향한다. 그것은 니콜스가 '양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함에 있어서 좌표로 삼았던 '사실'에 대한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데, <체코 드림> 에서 재현되는 모든 '사실'적 상황들은 작가의 의도에 대해 작위적으로 촉발된 것이라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에 나타나는 '수행적' 태도란, '관찰'이나 '촉매'의 기능을 넘어서는 보다 능동적인 '창발'을 이룸에 있다. '수행하다(perform)'이라는 개념의 언어적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클루삭과 레문다는 '사실'을 '기록'하거나 '체득'하지 않고 '사실을 수행한(perform reality)'셈이다.
   사실을 '창발'시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최근 들어 급격하게 증하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들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케이블 시리즈 <끔찍한 진실 The Awful Truth>(1999-2000)이나 모건 스펄록(Morgan Spurlock) 감독의 <수퍼사이즈 미(Super Size Me)>(2004) 등을 이에 포함시킬 수 있다. 브라보(Bravo) 채널 에서 두 시즌 동안 방영된 <끔찍한 진실>의 한 에피소드에서 무어 감독은 미국 시민들의 정치적인 무기력을 꼬집기 위해 무화과 한 그루를 의원 예비선거 후보자로 등록시키는 캠페인을 벌이고 실제로 득표까지 하게 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을 차례로 방문, 즉석에서 준비한 젊은이들의 무리 속으로 '마쉬(mash)'를 하면 지지를 하겠다고 약속, 앨런 키즈(Alan Keyes)가 실제로 마쉬핏으로 뛰어들자 남은 시즌동안 그를 지지하는 광고를 자신의 시리즈를 통해 내보냈다.
   <가장 달콤한 소리(The sweetest Sound)>(2001) 에서 앨런 벌리너(Alan Berliner) 감독은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전 세계에서 12명을 찾아 저녁 만찬에 초대한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감독의 욕망과 불안은 이름과 인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호기심어린 사유를 비롯하여, 조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무관심, 가족의 기능, 유태인 남성의 정체성 등 서로 연관된 많은 문제들을 끌어들인다. 지극히 사적인 그의 고민들에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이 투영된다.
   이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급증한 사적 다큐멘터리나 자전적 다큐멘터리의 작품들 역시 사적인 관심이나 관점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지식의 형성 과정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작품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행적 양식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 연구자가 선행 연구에서 밝혔듯, 자전적 다큐멘터리 작품들의 '수행성'은 두 가지 추가적인 특징을 갖는다. 먼저, 작품에서 작가가 규정하게 되는 본인의 정체성이나 대인관계가 작품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고정적으로 존재했다가 작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작품을 진행하는 동안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9)  또 한가지의 중요한 특징은, 작가가 제시하는 문제에 관해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조망하고 관계를 맺는 세계의 모습은 불확실 하고 가변적인 것이며 때문에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시된다. <가족 프로젝트; 아버지의 집>(2001) 에서 조윤경 감독은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상황에 대한 가족들의 거센 저항과 비난을 작품에 포함시키면서 자신 스스로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끝까지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행위가 얼마나 정당하고 적절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수행적 다큐멘터리 작품들의 특징을 논함에 있어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수행적 양식' 에 대한 니콜스의 설명은 그 수사적, 철학적 기반에 대한 기본적인 개요는 될수 있으나 '수행성' 이라는 개념과 기능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논거를 진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만큼 작품의 발상과 진행이 근본적으로 다른 정서와 창의력을 통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들은 니콜스가 말하는 '수행적' 기반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작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여러 문제들을 수반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를 자가적이고도 독립적인 테두리 안에서 규정되는 고정된 영역으로 보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다각적이고 다원적인 현대 사회와 역동적으로 교류하는 양상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오늘날 다큐멘터리와 접목되는 영역들이 다원화된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인식의 틀 역시 다원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수행적' 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 역시 다큐멘터리 역사의 문맥을 넘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동시대 아방가르드의 흐름속에서 수행성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향한 단서를 찾아야하는 것이다. 니콜스가 수행적 양식의 사례로 제시한 많은 작품들에 연관된 인물들 중, 장 케이롤, 말론 리그스 등 전통적인 문맥에서의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만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performative'라는 영어 단어를 번역함에 있어서 누락될 수 밖에 없는 의미들은 이 개념에 활력을 부여하는 '수행적' 인 것들이다. 공연평론가 김남수는 "선언적(declaratory)", "명령적(imperative)", "개시적(emergent)", "발효적(operative)"이라는 단어들로 이를 보완한다. 10) 수행적 행위란 미리 구성한 계획을 '실행'하여 예측되었던 결과를 '도출'하는 것과는 다른, 보다 즉흥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의 '실천'이다. 기획이나 결과 보다는 과정 자체가 행위의 본질이 된다. 행위의 효과는 창의적으로 소통의 송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를 새롭게 촉발시키고 변형시킴에 있다. 김남수의 표현대로, 수행적 행위는"하나의 결단이자 치명적 도약" 11) 이다.
   현대예술에서 '수행성'이 중요시되게 된 경위에는 퍼포먼스 아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더니티와 자본주의의 격정속에서 예술을 일깨우는, 그리하여 "현실적 균열"과 "이상적 얼룩" 을 창출하는 "예술실천" 12) 이었다. 하지만 김남수가 지적하듯, 소비문화의 거대한 권력은 '예술'로부터 '실천'을 제거했고, 퍼포먼스 아트는 초기의 실천적 역동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체코 드림> 이나 <영원한 불길>, <끔찍한 진실> 등의 영상 작품들이 실천하는 바는 퍼포먼스 아트의 잃어버린 유산이다. 또한 그리어슨이 '스튜디오 영화'의 진부한 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하며 좇았던 '다큐멘터리'의 변혁적인 가능성을 한 차원 더 발전시킨 형태이다. 이를 통해 작가들이 창발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도발적인 삶의 실천이다. 영상에서 재현되는 그들의 행위는 촬영 현장에서는 관습과 타성의 전복으로 기능했으며, 그 영상 기록이 관객에게 소통하는 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에 우리 모두가 투입해야 하는 창의성의 중요성이다. 영상 기록은 단순한 '실천'의 평면적인 기록에 머물지 않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가변적으로 작동하는 의미의 체계들을 자극하는 입체적 기능에 가까워진다.
   <캐치 미 이프 유 캔>(2004)은 최진성 감독이 국가보안법의 수호를 위한 시청 앞 광장의 집회에 가서 이에 참여하는 재향군인 단체들 틈에서 인공기('홍람오각별기')를 흔드는 발칙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옯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도 텔레토비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면을 쓴 연기자들이 귀엽고도 우스꽝 스런 모습으로 작은 인공기를 흔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보안법에 의거하여 이들이 연행된다면, 이토록 어수룩한 유아적 유희도 위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보안법이 얼마나 불합리한 법인가를 입증할 수 있단는 것이 그가 의지하는 단순한 논거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들의 용기는 광장을 곽 채운 집회 참여자들에 의해 금방 쇠퇴하고 만다. 흥분된 어조로 "애국"과 "반공"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어르신"들 앞에서 감독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말로조차 언급하지 못한다. 유아용 캐릭터가 이런 엄숙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타박을 받는 판이다. 결국 작은 인공기는 시청 앞 광장에서 나부끼지 못한다. 자막은 감독 스스로를 "소심남"이라 호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거리 퍼포먼스로 마무리된다. 고정된 전심공간의 먼 배경에는 대기중인 전투경찰들의 한가한 모습이 아른거리고, 전경에는 줄넘기를 하는 두 명의 학생들이 전경을 맴돌며, 후경에는 길바닥에서 요가를 하는 한 여성, 그리고 작은 인공기를 흔드는 텔레토비와 박정희 전 대통력 캐릭터들이 보인다. 그들의 작은 율동은 배경음악을 동반한다. 북한의 '애국가'이다. 물론 현장에서 재생한 것이 아니라, 후반 작업 과정에 입혀진 외재적 효과다. 이 우스꽝스런 광경이 펼쳐지는 장소는 분명 시청 근처의 한 외진 뒷실임이 역력하며, 연기자들의 '소심한' 율동은 행인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소소하다.
   결국 최진성 감독은 자신의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계산된 결과를 대신하여 즉흥적인 실패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의도되었던 주제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자유로운 민주적 표현의 장을 창발적으로 '실천'하려던 노력이, 그것이 극복하려던 국가적 권력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실패를 맞게 되었다는 상황은 오히려 그 압력의 세부적인 질감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로저와 나(Roger and Me)>(1989)에서 로저 스미스를 인터뷰하려는 시도를 끝내 성사시키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무어 감독의 "부정적 수사"와 다르지 않게, 최진성 감독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에 군림하는 제도적 폭력의 거대함에 대한 증거가 스스로 된 셈이다. 실패는 '성공적 수행'의 어머니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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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체코 드림>은 2005년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와 제2회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6)  Bill Nicols,Introduction to Documentar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1,pp.130-131.
7)  같은 책,p.131.
8)  같은 책,p.134.
9)  서현석 "스스로를 향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 자전적 다큐멘터리에 나타나는 주체와 사실에관하여", <언론학보> 50권 6호, 115-142쪽.
10) 김남수, "퍼포머티비티와 퍼포머티브", <페스티벌 봄 2009 매거진>. 경기도; 스펙터 프레스, 2009, 10쪽.
11) 김남수, 같은 책, 10쪽.
12) 김남수, 같은 책, 10쪽.​

 

 

 

4.'미학'에서 실천으로
   완전한 결과보다 역동적인 과정을 중시 여기는 태도는 오늘날의 '수행적' 예술 작품들에서도 꾸준히 볼수 있다. 다다나 초현실주의, 상황주의, 개념예술 그리고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퍼포먼스에 나타나는 열린 소통의 전례들을 따르는 작업들로 수행적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관람객의 관람 행위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작품은 창작 행위로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 행위에 의해 새로운 영역의 소통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두드러지는 이러한 성향에 관해 니콜라 보리오(Nicolas Bourriaud)는 "관계적 예술(relational art)"이라는 용어를 부여하며, 이들 작품이 대인 관계와 사회적 문맥을 재현하거나 새로이 촉발(prompt) 시킴에 주목한다. 13)
   보리오가 관계적 미술의 문맥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작가들은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르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필리페 파레노, 피에르 위게, 더글라스 고든 등으로, 이들은 기존의 미학적 전형을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모델을 제시한다. 관람객의 '미학적' 체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며, 전시장 안에서 혹은 그를 벗어난 외부의 연장선상에서 작품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새롭게 형성되는가가 중요해진다. 예술은 결국 인간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지만, 관적 미술은 인긴관계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경험'"하도록 새롭게 만든다. 보리오의 표현대로 "예술은 만남의 형세이다." 14)
   보리오가 사례로 제시하는 작품들 중에는 작가가 작업의 부분으로 실질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그 기록들을 전시한 예들도 포함된다. 일본의 사진작가 노리토시 히라카와는 함께 그리스로 여행갈 동반자를 공개적으로 모집, 여행 중에 촬영한 사진들을 전시하였다. 앨릭스 램버트(Alix Lambert)의 <결혼작품(Wedding Piece)>(1992)이라는 전시 작품은 작가가 6개월 동안 작품을 위해 세 차례 실제로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면서 남은 공식 서류들로 이루어졌다.
   관계적 미술 작품들이 기존의 미학적 범주를 벗어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선구적으로 촉발시킨다는 보리오의 주장은 좀 더 정교하게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15) 아방가르드의 연장선상에서 미술이 사회와 소통하고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혁해야 하는 절실함이 오늘날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감한 변화 속에서 사실과 창작은 기존의 모델보다 훨씬 더 다각적인 형태로 교류한다. "깨닫는다거나 이해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황적인 정보 외에도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적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은 이들 미술 작품들을 통해서도 탐구된다.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이나 이와 관련된 형식과 태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구현되는 현대의 예술영역은 공연이라 할 수 있다. 공연 분야에서도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대를 통해 주어지는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성향은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공연예술의 경우 시기적으로 다른 시각예술에서 이루어진 비판적 질문들, 즉 소통의 방식과 매체의 속성 등에 대한 성찰이 매우 늦게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공연 작품 대부분이 자본에 대한 강한 의존도를 갖기 때문이다. 16)  1980년대 이후 공연 매체의 미학적 기반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드라마로부터 탈피하거나  그 기본을 재구성하는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스-티에스레만(Hans-Thies Lehmann)이 "포스트드라마틱 시어터(postdramatic theatre)"라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에 의해서이다. 레만은 포스트드라마틱 시어터의 여러 다원적인 형태들에 대해 열거하면서, '사실'로의 파격을 포함시킨다. 폐쇄적이고 자가성립적인 허구의 세계를 무대화하는 고전적 연극의 고질적인 진부함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 다이에제시스 외부의 영역, 즉 관람객이 실제로 체험하는 사회적, 물리적 시공간을 향해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 된다. 재현을 멈추고 갑자기 연기자가 관객들을 향해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예로부터, 아예 관객의 체험과 연기자의 체험을 동질적인 기반으로 일치시키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실제의 난입(irruption of the real)' 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무대와 관객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은 불편하게 드러나거나 허물어진다.
   레만이 이 책을 독일어로 출간한 1999년 이후, 이러한 성향은 좀 더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레만이 공동 설립한 기센대학에서 실험적인 공연예술을 공부한 후 활동을 시작한 연출가들이 사실과 무대와의 간극에 대한 성찰을 적극적으로 작품화하면서 다큐멘터리와 연극의 접점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그 중 '다큐멘터리 연극'의 영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극단은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 이다. 세명의 연출가로 이루어진 이 극단의 경우, 전문 배우들로 구성된 허구적 내용을 무대에 올리는 대신, 실존 인물들의 자신에 대한 실제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극본과 연출을 한다. 그들이 '전문가'라 부르는 사람들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을 일컫는다. 이들의 발화는 관객이 직접 보고 들으며 기억할수 있도록 아무런 해설이나 개입없이 즉각적으로 제시된다. <크로스워드 피트 스톱(Crossword Pit Stop)>(2002) 에서는 자동차 경주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7-80대의 노인들이 출연, 이제는 양로원에서 움직임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안전수칙이 어떻게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그들의 삶에 적용되는지 이야기하며, <데드라인(Deadline>(2003)에서는 장례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여 그들이 체험한 죽음을 논하는가 하면, <네모파크(Mnemopark)>(2005) 에서는 미니어처 기차 모델 만들기를 취미로 삼는 노년의 동호회 회원들이 등장, 그들이 무대 위에 직접 제작해 놓은 고향의 미니어처를 배경으로 기억 속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끌어낸다. 한국에서 공연된 바 있는 <카를 마르크스 : 자본론 제1권(Karl Marx: Das Kapital, Erster Band)>(2008)  17) 는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책으로부터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작품들에서 숙련된 연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대는 완벽하지 못한 '아마추어'의 담론의 장이 된다. '비완벽'의 미학은 기존의 위계적인 미학 체계와 그에 따르는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한다.  18)  (연기자가 대사를 잊을 때와 같이) 어설픔과 불완전과 거북함이 드러날 때 도리어 무대는 물질적 세계의 현전으로 관객에게 주어진다. 사실과 무대의 간극은 상징적으로, 실질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이다. 허구에 대한 의심을 통해 관객은 '역사적 사실' 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무대와 객석, 연극과 사실의 간극을 가장 과감하게 붕괴시키는 이들의 작품은 <콜 커타(Call Cutta)>(2005)로, 이 '공연'은 한 명의 퍼포머와 한 명의 관객이 1:1 전화 대화를 통해 성립된다. 캘커타에 거주하는 인디아의 '퍼포머'가 미리 관람을 예약하고 '공연장' 기능을 하는 사무실 공간을 방문한 '관람객'에게 전화를 걸고 인터넷, 팩스 등을 통해 한 시간 동안 사적인 내용의 대화를 이끈다. 19)
   이러한 '탈드라마적'인 무대는 관객을 감정적 몰입과 비판적 거리감의 파장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를 통해 관람객이 체험하게 되는 '연극적' 사실이란 바로 그들 자신이 속한 역사와 사회의 단상이며, 허구적인 내용에 대한 환영적 동화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으로 대체된다. 연출가들이 구사하는 '연출력'이란 '사실'로부터의 재료들의 전람이자, '사실'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소통이다.

13)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trans, Simon Pleasance & Fronza Woods, Paris:Les presses du réel, 2002.
14)
15) 이에 대한 필요성을 가장 비판적으로 피력한 글은 다음과 같다. Anthony Downey, "Towards a Politics od (relational) Aesthetics", Thirs Text, vol.21, issue3, pp.267-275. 다우니는 이 글에서 보리오가 진보적인 인간관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이상적 발전 형태를 고려함에 있어서 필요한 기본적인 개념이나 사유 체계가 무엇인지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면서 모호한 이상주의를 그려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16) Hans-Thies Lehmann, Postdramatic theatre. Trans. Karen Jurs-Mundy. Abingdon and New York : Routledge, 2006.
17) 2009년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을 통해 아르코대극장에서 공연된 바 있다. 한국의 공연을 위해 개작된 이 버전에는 <자본론>을 완역한 강신중이 추가로 출연하였다.
18) Miriam Dreysse & Florian Malzacher(eds.), Experts of the Everyday: The Theaters of Rimini Protokoll. Berlin: Alexander Verlag Berlin, 2008.
19)이 작품은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바 있다. ​

 

 

 

5. 가변적 사실에 대한 가변적 결론
   다큐멘터리 영상, 시각미술, 공연예술에 최근 들어 사실을 입체화하고 소통을 확장하려는 노력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러 예술 영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표현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가 다원적으로 발생하고 잇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을 사회, 정치, 역사의 문맥속에서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의 원형적 목적 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리어슨이 칭한 '다큐멘터리'라는 운동성이 바로 그러한 목적 의식의 또 다른 형태이며, 이것이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다시 편입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오늘날 영화관과 미술관의 간극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작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 역시 좁혀지고 있다. 창작과 사실의 간극을 좁히는 행위 자체가 이제는 '창작'이라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곧 "사실의 창의적인 처리(creative treatment of reality)"라는 그리어슨의 정의가 열어놓은 가능성의 지평은 지금도 계속 넓게 확장되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역사적으로 축적한 담론의 체계 역시 이와 함께 변화하고 있다. 이제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치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변혁에 대한 갈망을 성립시키고 그에 수반되는 수사적, 이데올로기적, 정서적 영향력들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던지는 이 시대의 방식은 기존 매체와 양식의 제한된 평면성을 벗어나 사회와 ,지각적 현전과 직접적이고도 다각적인 상호작용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상호작용은 다큐멘터리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나타났을 뿐 아니라, 언제나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으로 존립해왔다. 이제는 상호작용의 결과만을 보여주는 것도, 누구에 의해, 어떠한 동기와 과정에 따라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윤리라는 고정적 관념의 보호 아래 정착할 수 없다. 사실이 유동적이고 다원적이듯, "사실을 창의적으로 처리하는 방식" 역시 역동적으로 진화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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